2차

[흑의 서/마왕] 희망

그 단어를 아주 오랫동안 잊었다.

008080 by t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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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희망… 날조

파트별로 간단하게 기록하다가 그만둔 초고.

시간이 나거나 마음이 들면 언젠가 정리해서 마저 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예정에 없음. 커미션하러 가야한다.


“제 이름은 흑의 서.”

처음 그것은 여상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 얼굴을 질리도록 보았기에 신경쓰지 않은 채로 돌아서려고 했던 것 같다. 저것을 다시 보는 것은 치가 떨리도록 싫었다. 흩날리는 새하얀 유해들과 새카만 붕괴체들을 매일 같이 헤치고 다니다보면 진짜 목적과 원인을 생각하기보다는 눈 앞에 있는 것을 원망하게 된다. 물론 지금 눈 앞에 있는 것은 대중에 뿌려진 저급한 복제품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당신께서 이 세계를 구세로 이끌어줄 왕이신가? 뭘, 그리 놀라지 마십시오. 폐하. 인간의 말을 구사하는 것은 제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저 눈이 오지 않던 눈 밭에 다시 내던져진 기분이 들어서 굳어있던 것인데 그는 내가 자신이 언어를 구사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생각해서 다시 말을 걸어왔다.

아주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그가 지금까지 보아온 복제된 마법서들과 다르다는 것을 관리자들에게 전해들었고 따라서 적어도 자아를 갖춘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내가 놀란 것은 ‘말을 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갑자기’ 말을 걸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지금까지의 소요에 더불어 최근 들어서 빠르게 나빠진 현 상황에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고 모두가 대충 얼굴을 훑어보기만 해도 내가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탓에 하멜에서 파견된 안내자들과 호위를 맡은 전투 부대, 소개받은 관리자들 모두 내게 되도록 긴 말을 하려하지 않았다. 물론 모두가 내가 힘들어보인다는 이유로 배려해준 것만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결과만큼은 그랬다.

그러나 지금 눈 앞에 끔찍한 악몽의 얼굴을 달고 있는 책은 달랐다.

지금 서로의 상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 심란하신 모습도, 심중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오나, 지금은 아가씨에 대한 부분은 그들에게 맡겨두도록 합시다. 이 몸으로 괜찮으시다면 그때까지 대화 상대정도는 되어드리겠습니다.”

그런 그와 이야기할 마음이 들었던 이유는 그 정중하고 다정한 말씨와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거나 예의없는 태도로 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에게 마음을 기대기에는 그들이 저지른 짓이 아직도 뇌리를 맴돌며 마음을 진정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내 경계심이 느껴진 탓인지 상대방도 나에게 고저없고 사무적인 말의 전달만을 하려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들을 제쳐두고 나를 멈춰서게 만들었던 것은 열 세 개의 마법서들이 원래 십자군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비슷한 처지’의 타인이었다. 오로지 대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수도 없이 많은 붕괴체를 강제로 양산해낸 하멜도, 게슈탈트 게획의 진행을 위해 만들어진 인간이 아닌 관리자들도 아닌 누군가. 존경과 경애를 받으나 신의와 존중은 받을 수 없는 인격.

그래서 나는 흑의 서를 기꺼이 대화 상대로 삼기로 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는 줄 알아?”

서로의 인기척만이 느껴지는 광활한 방에서 아주 오래된, 너무 오래되서 빛바랜 추억이야기를 했다.

1000년이 넘는 기억에는 당연히 빈 곳이 많았기에 자신이 기억하는 바를 덧붙이며 맞장구를 치던 목소리는 이야기가 점점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줄어들었다. 갈 수록 두서없이 토막난 말이 발치로 굴러떨어졌다.

그로부터 대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을까.

“아… 지금이 몇 월, 며칠이더라.”

그것은 딱히 의문으로 이루어진 말은 아니었다.

애당초 이곳에 온 후로 얼마간은 꾸준하게 날짜를 세고 시간을 짐작하고는 했다. 더이상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순전히 나 자신의 의지였다.

관리자들을 성으로 불러들여 물어본다면 그녀들은 단단하고 차가운 고철로 만들어진 마음으로 초단위의 정확한 시간을 알려줄테지만 그것은 의미가 없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알려주지 않으니까.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을 나아질 조짐도 없이 떠나보내면 될까. 나 혼자서 얼마나 기다리면 돼?

마음에 따라 목소리가 점차 거칠어졌다.

“전부 다 틀렸어. 이 계획은 실패했어! 약속따윈 다 거짓말이야… 적어도 너만은 믿고 있었는데!”

이제 눈 앞에 있는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다. 무언가 말을 한 것 같았지만 들리지는 않았다.

아니다. 들렸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의심의 불씨가 분노로 타오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흘렀고 흑이 그것을 잠재우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어르고 달래는 말에 의지해서 마음을 억누른 적이 수도 없이 많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머나먼 약속도. 천년의 거짓말도.


그날은 지루한 마음에 시간을 죽이려 성을 정처없이 돌아다니던 날이었다. 정확히는 살고 있는 집의 구조를 모르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탐험을 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성이 워낙 크고 복잡해서 그 탐험은 사나흘에 걸쳐서 진행되었는데 사실 그 중의 하루는 종일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보냈기에 탐험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 즈음에는 흑의 서와 가벼운 잡담과 농담을 나눌 정도의 사이는 되었는데, 그 탓에 마음이 제법 풀어진 것인지 책을 여기저기 끄집어내 어질러두고 장난을 쳤던 기억은 여전히 나쁘지 않은 추억처럼 느껴졌다.

흑의 서는 시종일관 예의바른 태도와 경어로 이야기하고는 했지만 그와 별개로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려고 노력했기에 내 마음 속에서 그에 대한 거리감은 상당히 빠르게 좁혀져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경계심도 상당히 허물어졌고. 물론 사실상 혼자나 마찬가지인 내 상태도 원인이었다.

왕성으로 거주지를 옮긴 후 언제나 곁에서 떨어지는 일이 없던 요나를 홀로 두는 것이 마음에 걸려 대부분의 시간을 침실에서 보냈지만 동결보존 상태인 그녀가 옛날처럼 햇살 아래 눈을 뜨고 일어나 맑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 일은 없었기에 나는 흑의 서와 단 둘이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가끔은 관리자들이 보고를 하러 오지만 우리 둘과 달리 그녀들은 해야하는 일이 끝도 없이 늘어져 있어서 오래 머무르는 법이 없었다.

내 역할은 언젠가 레드아이와 레기온을 전부 섬멸하는 날까지 안정된 마소를 공급하는 것. 사실상 ‘온전하게 존재하는 것’ 이었기 때문에 태양빛이 내리쬐는 성 밖으로 나갈 수도 없이 차가운 벽에 기대어 흘려보내야 하는 날 만이 이어졌다.

기약없는 약속의 날까지 정서적 교류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존재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도서관에서 예전에 읽은 기억이 있는 동화책을 찾아 흑의 서에게 건냈을때 그는 내밀어진 책이 5~6세 정도가 읽으면 적합한 수준의 동화책이라는 것은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 듯이 진중하게 말했다.

독서라니 감동했습니다, 폐하. 이것을 제게? 당신의 추천이라면 기꺼이 읽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책을 단단히 지탱하고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손과 팔을 갖춘 육신이 없었기에 자리에 앉아서 책장을 넘기는 것은 내가 되었다.

…그리고 요나가 어렸을 때도 자주 이렇게 해주었다.

작고 어려서 책을 읽는 것을 힘들어하는 요나를 앉혀두고 품에는 말랑하고 복실복실한 인형을 안겨준 채로 나는 맞은 편에 앉아 그림이 잘 보이도록 책을 들어올린 채 소리내어 글자를 읽어주었다. 그러면 요나는 언제 산만하게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냐는 듯이 즐거워하며 맞장구를 치고는 했다. 가끔은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져서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크게 웃으면서 놀리는 말을 해서 동화책은 뒷전이 되고 서로에게 장난을 치다가 지쳐 잠든 적도 많았다.

밝은 상아빛으로 반짝이는 새하얀 머리카락과 깨끗한 하늘을 닮은 연청색 눈동자를 떠올리자 상념에 잠겼던 얼굴의 틈새에서 옅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맞은 편에 있던 흑의 서가 의아한 듯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지만 괜히 요나의 이야기를 해서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급하게 새어나온 웃음의 변명거리를 만들어야했다.

“그냥… 그냥, 네가 책을 읽는게 웃겨서 그랬어. 하하. 그러는 너도 책이잖아.”

하지만 그건 그다지 좋은 변명은 아니었다.

나는 흑의 서를 비롯한 열 세권의 마법서가 모두 본래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들이 십자군 출신이라는 것도, 어떻게 이런 형태가 되었는지도 알고 있다. 인류를 위해 희생한 마법서들이 충분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인격자들이라는 사실도.

돌이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과거의 추억과 인류의 존속을 위한 부품들.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파오기 시작해서 나는 그냥 이 상황을 파하고자 다시 그를 부르려했다.

하지만 불편한 마음을 자각하자 어쩐지 그를 ‘흑의 서’라고 부르는 것도 탐탁치 않게 느껴졌다.

“저기… 흑, 이제 책은 그만 읽고 방으로 돌아가자. 책은 언제든지 읽으러와도 상관없잖아.”

“…흑? 제 이름을 줄이시면 곤란합니다. 제 이름은 흑의 서. 인류의 지혜에 의해 만들어진 위대한... 그러니까, 그러한 진묘한 이름으로 부르는 건...”

“하지만 흑의 서는 딱딱하잖아. 흑이 더 귀여워.”

당황한 듯이 항변하던 흑의 서도 단호하게 말하자 모시는 왕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는지 더 이상의 반론을 멈추고 얌전해졌다.

그렇게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낸 이후로는 관리자들에게 마법서를 언급할 때를 제외하고 언제나 그에게 ‘흑’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흑의 서도 내가 그렇게 부르는 것에 점차 익숙해져서 신경쓰지 않고 대답하게 되었다.

무례한 말을 해버렸는데도 책망받지 않았다는 안도감.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은 친밀감. 지루한 시간을 서로의 말에 의지해 흘려보내는 것에 적응한 익숙함이 한 곳에 모여 엉망진창으로 녹아 섞여서 만들어진 추억 비슷한 기억.

그 이후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 무거운 커튼이 쳐진 창과 넓은 침대 하나만이 놓인 서늘한 침실에서 뜬 눈으로 보낸 시간.

함께 잠들지 않는 동반자…


……

………

심홍의 서가 죽었다.

할루아가 죽었다.

루이제가 죽었다.

데볼과 포폴이 죽었다.

이제 곧, 흑의 서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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