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자 조각글

개인 훈련(05.01. 수정)

영토탈환전 이전 시점

행복회로 by 물풍선
86
2
0

- 최고 등급의 보안이 작동 중입니다. 신원 확인을 진행하시겠습니까?

"어."

홍채 인식부터 시작해 손바닥 전체를 스캔하고 몇 개의 보안코드를 입력하면 그제서야 확인증을 가져다 대는 화면이 떠오른다. 하얀 실험복 차림의 윤은 모든 절차를 막힘없이 인증했다. 조금의 어긋남도 용납하지 않겠다는듯 시종일관 딱딱하고 까다롭게 이루어지는 과정이 긴장스러울 법도 하지만 윤에게는 수도 없이 반복해 온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달리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다.

탕. 타당.

일부러 소리를 원천 차단하지 않도록 지은 방음벽이 총소리를 뭉툭하게, 그러나 확실히 분별할 수는 있을 정도로 전해왔다. 윤이 고개를 내려 손목 시계를 확인했다. 시곗바늘이 자정을 한참 넘어가 있었다. 오전 2시 17분.

- 블랙배저 특정직 1기 최윤. 신원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윤은 실험복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넣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복잡한 절차를 거쳐 들어왔는데도 공간은 문을 통과하기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베이지색 벽을 세운 너른 복도, 사람은 물론이고 개미 한 마리조차 없을 것 같은 폐쇄성, 그리고 여기 저기 달려 있는 감시 카메라. 다른 점은 어떤 소리가 들려온다는 사실이었다. 생활소음은 아닐 게 분명한, 사람의 몸을 경직시키는.

쾅-! 커다란 울림이 미세한 진동과 함께 밀려왔다. 이건 폭탄이 터질 때나 나는 종류였다. 총소리와 비교하면 상당히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에 윤은 그가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음을 알았다.

머지않아 다시 문이었다.

좌우로 갈라져 열리는 구조 앞에서 복잡한 인증을 또 한 번 마치자 길이 열리는 대신 선택권이 주어졌다. 무심히 화면을 보던 윤은 짧은 생각을 끝냈다. 들어가기 위해서는 안에 있는 사람의 승인이 필요한데 들려오는 소리를 듣자하니 당장은 그런 요청을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듯 했다. 윤으로서는 극히 드문 일이지만 괜히 상대를 방해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윤이 제 답을 툭 뱉었다.

"견학 요청."

- 최윤의 견학 요청을 승인합니다. 현재 진행 중인 모의 전투는 8단계이므로 사전 고지를 생략합니다.

윤은 보안 시스템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앞을 가로막은 문과 벽이 일체가 되듯 구분이 사라지더니 표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마치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규칙성 없이 벽 전체로 퍼진 현상은 두꺼운 무채색 가로막에 불과하던 벽을 불투명한 모자이크 화면으로 바꿔놓았다. 이윽고 네모 하나하나가 빠르게 뒤집히며 무언가를 비추기 시작했다. 벽 건너편의, 윤이 찾으러 온 사람이었다.

꽁지 머리에 전투복 차림을 한 남자가 무언가를 피해 몸을 굴렸다. 직전까지 남자의 몸이 있던 자리로 곤충의 앞발 같은 것이 단단히 내리꽂혔다. 그와 떨어진 곳에서 급하게 멈춘 남자의 몸이 바로 섰다.

- 모의 전투의 예상 종료 시각은 오전 2시 44분이며, 이곳의 모든 권한은 총사령관에게 있습니다.

콘크리트 바닥이 박살나는 소리를 배경으로 시스템이 안내했다. 모의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는 개인 훈련실 내부로 들어가려면 총사령관의 허가를 받으라는 말이 끝이었다. 윤은 다시 한 번 손목을 확인했다. 오전 2시 44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정면으로 되돌린 눈길 끝에는 이쪽을 향한 시선이 있었다. 어느 순간 전투를 끝낸 상대가 통신기를 착용한 귀에 손을 올리고 입을 열었다.

"출입 승인."

짧고 깔끔한, 허스키한 목소리. 윤이 익히 알고 있고 대체로 기꺼운 것.

건너편을 비추는 상태 그대로 문이 있던 위치의 벽이 선선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너머로 모의 전투의 잔해가 점점 지워지는 것이 보였다. 수없이 부서지고 갈라졌을 바닥과 벽이 드러난 자리는 모두 멀쩡하기만 했다. 격렬한 싸움은 환상이었다는 양 스르륵 걷히는 흔적 속에서 형체변동무기를 거둔 총사령관 이예현이 열린 문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반가움을 담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윤. 지금 새벽이지?"

아직 퇴근 안 했네. 의문을 담은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윤은 대꾸없이 훈련실로 들어와 출입구 근처 선반에 놓인 수건과 물병을 챙겨서 예현에게 건넸다. 씻고 나와. 집에 가자. 예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샤워실의 불이 켜지자 시야 한 구석이 밝아졌다. 윤은 눈 앞에 예현의 모의 전투 결과를 띄워 놓고 빠르게 훑었다.

블랙배저 특정직 1기 이예현, X월 X일 8단계 모의 전투 실시, 총 소요 시간 — 분. 힘, 스피드, 이하 각종 전투력의 지표(그린 듯한 육각형을 이루고 있다)… 종합 평가: 현장 투입을 적극 권하는 출중한 배저. 밸런스가 좋고 임기응변에 뛰어나 지형지물 등 여타 조건에 관계없이 뛰어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임.…어떤 인선이든 잘 맞추어 협력할 수 있으나 인력 낭비를 피할 수 있도록 적절한 때와 장소에 배치할 것. 비고, 또는 기타 사항: 전선 투입을 권장하지 않음.

윤은 직급에 상관없이 도출되는 종합 평가와 대상의 관련 사항을 모두 고려하는 비고란을 끝으로 화면을 내렸다. 읽은 내용도 그밖의 것들도 모두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잊을만하면 불거진다고 하는 블랙배저 총사령관의 실력 논란이 실로 우스운 농담조차 될 수 없음은 그가 가장 잘 알았다. 남들만큼의 시간을 들이지 못한다 뿐이지, 예현은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는 와중에도 종종 개인 훈련실로 향했으니까.

다만 오늘의 훈련은 단순히 실력 유지를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윤은 그걸 직접 확인하기 위해 왔다.

총사령관의 개인 훈련실에서 모의 전투의 난이도는 크리처의 등급과 같다. 방금 예현이 했던 모의 전투의 등급은 8단계. 그리고 지금 블랙배저는 전례 없는 변수를 낀 채 탈환전을 앞두고 있다. 각각을 합치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명확했으나, 단언하건대 그건 윤에게 내키거나 달갑지는 않은 일이었다. 예현이 정한 일에 토를 달고 싶은건 아니었지만.

금방 물 떨어지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윤은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며 나오는 예현에게 다가갔다. 드라이기 줘 봐. 응. 어디에 뒀더라… 금방 목표물을 찾아서 제게 돌아오는 걸음걸음이 하느작거리는게 꽤 웃겼다. 예현은 윤이 픽 웃든 말든 몸에서 힘을 빼고 늘어졌다. 윙 소리를 내며 따뜻한 바람이 쏟아지자 스르륵 눈을 감는 모습이 상당히 피로해 보였다. 윤은 무심한 얼굴로 손을 움직이며 생각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확실하게 물어보려 했는데, 분명 자고 있겠다고.

놀랍게도 안 잤다.

예현은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그는 조수석에 앉아 휙휙 날아가는 풍경을 보다 뜬금없이 말했다.

"심심하다. 윤, 재미있는 얘기 좀 해 봐."

"혹시 꼰대가 뭔지 아십니까?"

"알지. 근데 윤은 나랑 동갑이잖아.“

예현이 김 샌다는 양 몸에서 힘을 빼고 추욱 늘어졌다. 가능하기만 했다면 기꺼이 녹아내렸을 것만 같은 모습의 상사를 흘끗 본 윤이 운전대에서 손을 뗐다. 자율주행 모드로 전환된 차가 부드럽게 나아간다. 새벽 도로를 밝히는 가로등 불빛은 형형했다. 윤이 시선을 정면에 둔 채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응.”

“이번 작전에 이의 있습니다.”

“다들 그러더라.”

예현은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결국엔 모두 납득했지. 어느샌가 그는 등을 곧게 세우고 앉아 있었다. 윤은 예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예현은 차창 너머 가까운 곳을 응시하는 것 같다가도 저 먼 어딘가를 눈에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회피나 외면이 아닌 직시였다. 사실 관계를 충분히 숙지한 상태에서 여러 변수와 상황을 가정하고, 앞으로의 향방과 그걸 위해 필요한 것을 파악한 사람의 시선이었다.

예현은 윤에게 길게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작전의 중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과학동에서 나온 것이고 상대는 그곳의 NPC같은 사람이므로, 굳이 따지자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물론 최종 결정을 번복할 생각도 없었다.

길지 않은 침묵 끝에 윤은 결국 인정에 가까운 한숨을 쉬었다. 불만을 숨기지 않은 얼굴은 덤이었다.

“수뇌부 선에서 끝낸 이야기가 있는 것 같긴 합니다만.”

8단계 크리처를 단신으로 상대하는 일일 체험을 끝낸 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다행히 감이 많이 떨어지지는 않았더라.”

어처구니가 없어진 윤은 픽 웃었다. 다시 앞을 바라보며 운전대를 잡았다.

“앞으로 잠이나 충분히 자라. 퇴근 시간 넘길 때마다 잡으러 가기 전에.”

공적인 시간은 이제 끝이다.

윤은 오기 전에 자기한테 연락만 먼저 달라며 눈을 감는 예현을 옆에 둔 채 집으로 달렸다.

카테고리
#2차창작

댓글 0



추천 포스트